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문단 편집) == 여담 == * 흔히 양자 결연으로 이뤄진 황실이기 때문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끼리 능력위주로 제위를 이었다고 알려져 있고 진짜 그렇게 알고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스키피오 가문, 피소 가문 등 공화정, 제정 시대 명문가들과 제정 시대 카이사르 가문([[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등과 비슷하게 오현제 시대로도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전형적인 로마 귀족들의 족벌주의 형태로 제위를 이어나갔다. 따라서 네르바 이후의 트라야누스 이래로, 제위는 트라야누스와 그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 남매의 혈육들을 중심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결혼, 상호 입양 역시 트라야누스 혈육들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가 그들인데, 네 사람 모두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딸 [[살로니아 마티디아]]의 두 딸 [[비비아 사비나]],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남편이나 혈육들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비비아 사비나의 남편이며,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사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손자이며, 콤모두스는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증손자이자 외증손이다. 아울러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남매의 외가쪽 오촌 조카이며, 트라야누스의 보호를 받던 피보호 혈육이었다. * 다른 양자 사이와 달리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 사이의 나이 차이는 10세밖에 안 됐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입양법을 개정해야했다고 한다. 그전의 입양법으로는 그 정도 나이 차이로는 양자 관계가 성립이 안 됐다. *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인데 이 왕조에는 또 다른 황제가 한 명 있다. [[루키우스 베루스]]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첫 후계자였다가 병사한 아일리우스의 아들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같은 양아버지를 둔 형제 사이로 형제 간의 우애가 친형제 이상으로 좋았다. 사실 본인은 제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형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완강한 요청에 따라 원로원이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면서 로마 역사상 최초의 공동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전부터 사람은 온화하고 예의바르지만, 지나치게 쾌락을 추구한다고 평가받은 사람답게 황제 즉위 후에도 낙천적으로 유흥을 즐기고 살았던 멋쟁이였다. 그러나 [[콤모두스|조카]]처럼 아예 국사를 내팽쳐치고 놀고 먹는 사람은 아니었고, 낙천적이고 화려한 사생활 때문에 원로원과 공동 황제 마르쿠스에게 걱정을 끼쳤어도 업무에 지칠대로 지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형]]을 나름 잘 보좌해주고 맡은 업무는 완벽히 처리해낸 괜찮은 황제였다. 베루스는 조카인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단죄된 이후, 생전 철없고 화려한 이미지 탓에 놀고 먹다가 사망한 방탕한 황제로 후대 로마인들에게 기록되기도 했고, 종종 조카가 까일 때 형 내외와 함께 거론돼 비난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169년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침공을 방어하고 회군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다가 혼수 상태로 로마 귀환 후 과로로 사망했다.[* 오늘날에는 뇌와 관련된 급성질환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밤낮이 자주 뒤바뀌는 불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가장 큰 이유로 분석되고 있다.] * 콤모두스가 암살될 당시, 그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가문의 계보는 완전히 단절됐다. 그러나 내전 당시, 도나우 군단의 추대로 황제를 자처하고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어거지로 안토니누스 가문의 계보가 이어졌다.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의 정통성 확보와 권위를 위해 폭군으로 단죄돼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콤모두스를 복권시키면서 자신과 장남 [[카라칼라]]를 안토니누스 가문에 셀프 입양했다[* 이 입양선언은 정치적 정통성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고, 이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간의 내전이라는 특수성도 고려해봐야 한다.]. 이 때문에 카라칼라가 모든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안토니누스 칙령>''', 카라칼라가 도입한 2[[데나리우스]] 은화인 '''안토니니아누스'''(antoninianus) 등에 안토니누스 가문의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 로마인들에게 존속했던 2세기를 비롯해, 멸문한 3, 4세기에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영향과 그 상징성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예를 들어, 원로원은 [[데키우스]] 황제와 두 아들에게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을 내렸고,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가문명을 아예 '트라야누스'로 바꿨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도 계속 되었는데, 4세기 작성된 믿을 수 없는 고대 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소위 원로원 내 대표주자로 '정통성 있다'는 고르디아누스 일가의 세 황제들[*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의 가계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제들이 거론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의 주장은 20세기 이래, 이탈리아와 유럽, 소아시아 일대에서 발굴되는 유적, 유물, 비석 등을 통해 죄다 거짓으로 판명됐다. * 가문의 대는 콤모두스를 끝으로 단절됐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전 약혼녀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누나인 케이오이아 파비아의 아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폼페이아누스 등 방계 황족들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몰락한 이후에도 살아 있었고, 그들의 대는 최소 3세기 후반까지 원로원 명부에 확인되고 있다. 또 케이오이아 파비아의 여동생으로 하드리아누스의 양손녀가 되는 케이오이아 플라우티아 역시 그녀가 낳은 딸이 리키니우스 발부스와 결혼해 대를 이었는데 이 두사람이 낳은 아들이 바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친부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였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친부가 명문 귀족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 부관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이 발부스가 맞는지 불분명하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내세우고 있는 주장일 뿐이다.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이 워낙 위서인데다 이런 명문가 귀족이 친부라면 당장 로마인들의 관습과 전통상 풀네임에 그 흔적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발부스의 아들이 고르디아누스 3세라는 이야기는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정통성을 위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중 흔히 '플라우티우스'라고 하는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와 결혼해 안토니누스 가문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장인과 처남 콤모두스 시대 동안 두 황제에게 신임을 받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에는 여러 사위 중 그를 적극 밀어줬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장인 사망 당시 국장 수행 멤버였는데, 그럼에도 아내의 언니 루킬라가 콤모두스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킬 당시 개입하지 않아 마르쿠스의 사위 중 목숨을 건졌다. 플라우티우스는 콤모두스 암살 당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몇 없는 남성 황족이자 마르쿠스의 사위임에도 제위에 욕심을 안 냈는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돈으로 사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군하자 이런 모습을 보고 아예 은퇴선언을 해버리며, 가족들과 함께 시골 별장에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가 자신의 진군 당시, 국법에 따라 이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라고 반대한 것을 빌미삼아 205년 사형을 명령한 뒤 그를 살해했다. [[분류:로마 황가]][[분류:1세기]][[분류:2세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